다음 작품은 이향희의 1998년 작 알레르기 알레고리에서 발췌한 희곡이다.
등장인물
702호 (남자, 슈퍼마켓 주인, 40대 초반)
602호 (남자, 꽃집 주인, 40대 초반)
502호 (여자, 30대 후반)
402호 (여자, 30대 후반)
경찰 (남자, 30대 중반)
무대 슈퍼마켓 내부. 무대 전체를 하나의 슈퍼마켓으로 꾸민다. 무대 앞에 배우들이 서있을 수 있는 공간을 제외하고는 무대 전체에 세겹 이상의 진열대를 설치하고 진열대 위에는 물건들을 놓는다. 진열대는 관객이 보면 미로 같은 분위기가 나야 한다. 배우들의 출입구는 왼쪽 하나만을 쓰도록 하고 계산대는 중앙에 놓는다. 계산대 앞에 작은 휴대용 TV가 켜져있다.
무대 밝아지면 702호가 계산대 옆에서 작은 TV를 보고 있다. 602호와 502호가 차례로 등장해 물건을 고르려는 듯 진열대 사이사이를 왔다갔다하며 바구니에 물건을 담는다. 602호와 402호 물건을 고르다가 같은 진열대 앞에서 만난다. 같은 물건을 고르다가 서로 본다. 서로 집어든 물건 본다. 서로 집어든 물건을 제자리에 놓는다. 서로의 물건을 찾아 다른 진열대로 간다. 경찰 등장한다.
경찰: (702호에게) 실례합니다.
702호: 무슨 일이십니까?
경찰: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실종 신고를 받았거든요. 나이 46세, 키 175, 그리고 얼굴이 동그란 남자 못 보셨습니까? 실종 당시 옷은 청바지에 파란 스웨터 차림입니다.
702호, 자기를 아래 위로 내려다본다. 청바지에 파란 스웨터를 입은 702호.
702호: 쌍카풀이 있나요?
경찰: (수첩을 뒤적이며) 있습니다.
702호: 혹시 덧니가 있습니까?
경찰: 네, 맞습니다.
702호: 그럼, 그건 전 데요?
경찰: (그제야 702호를 가만 살펴보고 끄덕인다) 아저씨가 요앞 21세기 아파트 101동 506호에 사십니까?
702호: 전 104동 702홉니다.
경찰: 그럼 아저씨가 아니군요......아저씨랑 똑같이 생긴 분 못 보셨습니까?
702호: 못 봤는데요.
경찰: (끄덕이며) 아무튼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아저씨와 비슷한 사람을 보면 즉시 연락 부탁드립니다.
경찰 퇴장한다. 진열대 사이에서 502호가 나온다.
502호: 아저씨, 402호가 어떤 된장 먹는지 아세요?
702호: 402호가 누구시더라......
502호: 있잖아요. 환경운동함네 하면서 히쭈구리한 옷 입고 다니는 여자.
702호: 아, 그분! (재채기하려고 한다) 에......! 그분은 슈퍼마켓에서는 절대 물건을 안 삽니다......(재채기한다) 에......에취!
502호: 그럼 그렇지......(바구니를 계산대 옆에 던지듯이 둔다) 어쩐지 오늘 엘리베이터가 4층에서 멈췄는데 메주 냄새가 진동하더라니까......하여간 웃기는 여자야......제 남편이 그 집에서 된장찌개를 먹고오더니 맛이 확 틀리다고 그래서요.
702호: 왜 댁에 남편이 402호에 가서 된장찌개를 먹습니까?
502호: (웃음을 감추며) 그럴 일이 있었어요. 아저씨도 그런 일 있으세요?
702호: 어떤 일이요?
502호: 자기 집인 줄 알고 남의 집을 불쑥 들어간다든지......
702호: 그럼요. 전 잠까지 자고 나온 적이 있는 걸요.
502호: (놀란다. 찬찬히 702호를 살핀다)
702호: 왜 그러십니까?
502호: 언제요? 혹시 어제 밤 아니세요?
702호: 아뇨. 한달 전 일인데요.
502호: (안도의 한숨을 쉰다) 난 또......깜짝 놀랐잖아요.
702호: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502호: (한숨) 실은......어제 우리 집에 끔찍한 사건이 있었어요.
702호: 뭔데요?
502호: 전 지금도 어젯밤만 생각하면 제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이 꿈만 같아요 (몸서리친다).
702호: 가슴의 응어리는 풀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홧병이 되거든요.
502호: (누가 듣기라도 하듯 주위를 둘러본 다음에) 바로 어젯밤이었어요. 제 남편이 새벽 두시가 지나도록 안 들어왔거든요.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쳐서 거실에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4시쯤인가, 인기척이 있기에 보니까 제 옆에 누가 누워있는거에요. 전 제 남편인줄 알고 자기야, 방에 가서 자. 그랬는데......
702호: (호기심에 어려) 그랬는데요?
502호: 번뜩 스치는 예감이 이상해서 자세히 살펴보니까......(주위를 둘러본다) 우리 신랑이 아니었어요. 어찌나 놀랐든지 (소리를 지른다) 아......아......악!
702호: (놀라서) 쉬이-잇, 누가 관리실에 신고하겠어요. 조용히 하세요.
502호: 그 남자도 놀랐는지 벌떡 일어나서 주위를 살피더니 허겁지겁 도망을 가더군요. 양말 한 짝을 남겨놓고.
702호: 그 남자가......에취, 에취! 누굽니까?
502호: (신경질적으로)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남긴 거라곤 그 흔해빠진 양말 한짝 뿐인데. 그저 도둑이었나 보다, 하는 거죠.
702호: 그거 이상하군. 일을 더 크게 벌릴 만도 한데 그냥 그렇게 끝나다니......그렇죠?
502호: 그렇죠? 단순 도둑이라고 하기엔 너무 수상하죠?
'이청희 「알레르기」에서 질문의 방식이 상황 전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분석해보겠다.
분석
이청희의 「알레르기」는 세 채의 아파트가 병렬적으로 배치된 무대를 통해 사회적 단절을 시각화한다. 인물들은 각자의 ‘호수’에 고립되어 있으며, 이는 현대 사회의 폐쇄적 구조를 반영한다. 무대의 제한된 공간은 소통이 단절된 사회적 상황을 상징하고, 이러한 설정이 작품의 주제인 비인간화와 소외를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등장인물들이 이름 대신 ‘402호’, ‘502호’, ‘702호’ 등으로 불리며, 개인의 정체성이 사회적 기호로 환원된다. 이는 인간이 더 이상 고유한 개체가 아닌, 사회 체계 속의 익명적 존재로 취급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작품의 언어 구조는 짧고 단절된 질문과 단답형 대사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질문의 반복은 대화의 흐름을 단절시키며, 의미 전달보다 오히려 소통 불가능성을 부각한다. 감정이 결여된 언어 사용은 인물 간의 관계를 차갑고 기계적으로 만들며, 이는 비인간화된 사회에서 인간의 내면이 점차 소멸해가는 현실을 반영한다.
작품 속 질문은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를 넘어, 인물 간 권력 관계와 심리적 긴장을 형성하는 핵심 장치로 기능한다. 702호의 공격적 질문은 타인을 평가하고 통제하려는 태도를 드러내는 반면, 502호는 반문이나 회피를 통해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처럼 질문의 방식은 각 인물의 성격과 사회적 위치를 드러내며, 권력의 불균형을 시각화한다. 또한 짧은 질문의 반복은 점진적으로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처음에는 일상적인 의문으로 시작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질문이 정체성 자체를 위협하는 폭력적 언어로 변모한다. “당신은 정말 502호입니까?”와 같은 문장은 단순한 의문이 아니라 존재를 부정하는 행위로 작용하며, 인물의 내적 불안을 증폭시킨다. 이로써 작가는 질문이라는 형식을 통해 사회적 불안, 개인의 위축, 정체성의 붕괴를 단계적으로 보여준다.
작품의 중심 사건은 ‘도난 의심’이라는 단순한 갈등에서 출발하지만, 그 의미는 점차 확장된다. 이 사건은 누가 물건을 훔쳤는가 하는 외적 문제에서, ‘나는 누구인가’, ‘무엇이 진실인가’라는 내적 질문으로 전환된다. 즉, 사건은 외부적 갈등이 아니라 자기 인식과 사회 구조의 비판을 이끄는 장치가 된다. 이 과정에서 ‘된장’, ‘슈퍼마켓’, ‘물건’ 등 일상적 소재는 모두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된장’은 전통적 가치와 인간적 진정성을, ‘슈퍼마켓’은 소비 사회의 비정한 질서를, ‘물건’은 인간이 상품화되는 현실을 상징한다. 질문은 이 모든 상징을 연결하며, 인간의 가치가 물질 중심 사회 속에서 어떻게 희석되는지를 드러낸다. 결말에서 702호가 “끝나면 그게 끝이니까요.”라고 말하는 장면은, 질문의 종착점이 해답이 아닌 허무와 소통의 부재임을 보여준다. 질문이 많을수록 의미는 줄어들고, 결국 작가는 이를 통해 현대인의 존재적 고립과 인간 소외의 비극을 완성한다.
이청희는 「알레르기」에서 질문의 방식을 통해 사건을 전개시키는 동시에 주제를 심화시킨다. 질문은 단순한 대화가 아니라, 인물 간의 권력 관계를 드러내고 사회 구조의 문제를 비판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무대의 폐쇄성, 숫자로 대체된 이름, 상징적 소재, 단절된 언어 구조는 결국 “질문이 많을수록 소통은 더 멀어진다”는 역설적 현실을 드러낸다. 즉, 질문은 작품의 구조적 축이자 철학적 메시지의 전달 도구이며, 이를 통해 작가는 비인간화된 사회 속 인간의 고립을 강렬하게 폭로한다.